Mabinogi

[디스아스터] 만찬 미식가

ㄲr람 2024. 9. 2. 00:14

 

 

 

 

 

 

 

 

 

 

 

 

 

 

 

만찬 미식가

 

두려워 말지어다

내가 널 사랑하는 데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맹목적인 마음으로

내가 널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있었다면

기필코 다른 감정과 착각했을 테니

그러니 나는 너를 무한히 사랑한다

아무런 단점도 부끄러워 말지어다

 

 

 

 

 

 

 

 

 

 

 

"아휴,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네요."

 

밀레시안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기에 짐꾼이 내려놓는 감자 자루가 쓸린 것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물방울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눈도 아니고, 비가 오는 것쯤이야 늘상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는 더 신경 쓰지 않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주방을 벗어나기 전 벽의 거울을 보며 간단히 제 얼굴을 체크한 남자는 흠잡을 곳 없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손님을 맞이했다.

 

"그런가요? 소리를 전혀 못 들었는데. 밖에 꺼내둔 의자를 치워야겠어요."

 

"제가 들어오면서 치워뒀답니다. 그냥 거기 계세요."

 

"고마워라⋯.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머리를 직접 잘라낸 것인지 앞머리가 유독 삐뚤빼뚤한 여인은 이 가게의 아주 오래된 단골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얼음을 부탁하며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 앞 정육점에서 밥을 주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고, 건너 사거리에 있는 은행에 새로운 커피 머신이 들어왔고, 또⋯. 밀레시안은 잡다한 일상 얘기를 전달 받으며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여자가 마구잡이로 늘어놓는 이야기 중 그다지 흥미롭거나 새로운 사실은 없었지만 그는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들어 주며 적당한 호응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랬나요? 하마터면 모를 뻔했어요. 오늘도 수고 많으시네요. 이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저를 찾는 모든 이에게 살갑게 구는 것. 그는 근방에서 단골이 제일 많은 가게의 주인이었다.

 

앤티크한 나뭇결이 살아있는 인테리어, 애정으로 관리하고 닦아 꾸민 아기자기한 소품, 그리고 유행을 타지 않는 고전 재즈. 그곳은 방문한 이로 하여금 감탄을 살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했고, 그보다 더 유려하고 우아한 주인이 반겨주기에 단골을 넘어선 팬들이 많기도 했다. 심지어는 음식점의 본질인 요리조차 흠잡을 데 하나 없었으니 점심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재료가 소진되어 닫아버리는 때가 많아 밀레시안은 여러모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거 아세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인은 단 한 모금 만에 잔의 절반을 비워버리며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밀레시안은 제 머리칼을 단정히 넘기며 마주 앉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쏟아진 비 때문인지 오늘은 평소보다 손님이 없었기에 제법 여유가 있었다. 여자는 아무 데도 말하면 안 된다는 듯 연신 과장된 손짓을 하다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한동안 사영파가 난동을 부려서 분위기가 안 좋았잖아요. 근데 얼마 전에 그곳의 수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나 봐요. 골목에서 거기 대빵이 늘 하고 다니는 금목걸이랑 핏자국이 발견 돼서 누가 처리한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럴 만한 실력자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다들 아닐 거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인가 봐요."

 

"왜요? 그 범인이라도 잡혔나요?"

 

"그건 아니고⋯. 부두목이 찾아내면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소리를 질러댄 탓에 이 동네 사는 사람은 다 알게 됐어요. 보통 실력자가 아닌지 도무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어서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로 소문만 무성해요. 철물점 장 씨네는 분명 베인 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기엔 톨비쉬예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베인, 그놈이라면 티를 안 낼 리가 없어요. 보란 듯이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만 태도가 다를 거라고요. 그런데 잠잠하잖아요. 오히려 톨비쉬 같은 인간이 속으론 칼을 품어서 정말 무서운 사람일 거라니까요."

 

밀레시안은 눈을 휘어 웃으며 동감한다는 듯이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제 의견이 공감받자 신이 난다는 듯 손을 휘적이곤 목소리를 키웠다. 그것 봐요, 밀레시안도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죠. 장 씨, 그 아지매는 아는 척만 하기 좋아하고 다 틀린다니깐. 남자는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더 따라주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엔 가봤나요? 요즈음엔 젤라토가 유행이래요. 물을 들이켠 여인은 이번에도 아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일상의 단조로운 평화 속에서, 잘 데운 물로 씻어 향긋한 찻잎의 냄새가 유독 두드러지는 잔의 입구를 문지르던 밀레시안이 제 손을 탁자 위에 도로 얌전히 내려 놓았다. 베인이니, 톨비쉬니⋯. 흑사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직의 거물들을 쉽게 거론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범한 이들에겐 그들의 존재가 자극적이겠지.

 

밀레시안, 아니, 루는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부드러운 마찰 소리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그림자엔 항상 그가 숨어 있었다. 사영파의 우두머리를 처치한 것도 다른 그 누군가 아닌 루였다.

 

귓가를 때리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아무리 구룡이 국지성 호우로 유명한 곳이라 한들 지금의 폭우는 분명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얼핏 옅은 감상에 갇혀 듣는다면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폭풍우 같기도 했다. 루는 창밖의 비가 더 거세지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산은 있으세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오늘은 쉽게 그치지 않을 모양이네요."

 

"양산이긴 하지만 있어요. 오늘도 잘 먹었어요. 내일 또 올게요!"

 

"그럼요. 언제나 고마워요. 내일 봐요."

 

마지막 손님마저 빠져나간 가게는 금세 고요해졌다. 느릿한 손길로 접시를 치우며 나직하게 흥얼거린 이는 문 앞의 팻말을 뒤집어 영업 종료를 알렸다. closed. 천진한 일상을 끝내는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를 일찍 끝마칠 적에는 항상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재료가 소진되었다느니, 어쩐다느니, 여러 핑계로 문을 닫고 난 후에는 그의 밤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특별히 들어온 의뢰가 없었지만 새벽이 지나기 전, 지난번 의뢰인이 부탁한 운반을 위해 밀항 루트를 미리 살펴볼 생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저녁이었다. 자유 시간이 생겼으니 간만에 누군가를 불러서 근사한 요리를 해줄까? 그에겐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잘 쟁여둔 고급 소고기가 있었다. 마블링이 끝내줬지. 매번 주방에 들어갈 때마다 달큰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적포도주도 한 병이 있고. 루는 직접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제가 만든 것을 입에 넣으며 기쁜 얼굴을 짓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식사야말로 모든 종을 막론하고 최선으로 내보일 수 있는 호의의 표시이다. 모든 생물은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무언가를 섭취해야만 했고, 그것은 상대가 제일 취약한 부분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작은 그램 단위조차 손끝에서 계획된 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행위. 루는 식재료들을 꺼내 풍족한 만찬의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대."

 

눈 앞의 루는 플레이팅을 끝마치고 있던 참이었다. 분명 저를 부르는 것을 들었을 텐데도 그다지 유의미 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제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당장 반응하는 것보단 데미글라스 소스를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날려버릴 만큼 도발적인 행동이었으나 어쩐지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베인은 누군가를 제 발아래 굴복시키고 복종하는 것에 기쁨을 찾는 사람이었는데도 루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낯간지럽고도 모호한 감정을 무어라 명명하는 것이 좋을까. 유희 혹은 쾌락? 그런 단어로는 자신이 지닌 진심의 무게를 전부 담을 수 없었고, 사랑 따위의 말로는 질척이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베인은 그를 재촉하며 움직이는 대신 젖은 제 어깨를 털며 주방 입구 부근에 늘어지듯 기대어 서선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듯이, 그를 보고 있을 때면 비슷한 효용을 내는 듯 성싶었다. 양손에 접시를 든 채 뒤돌아선 루는 그제야 매끄럽고도 완벽한 웃음을 흘리며 제 이름을 불렀다.

 

"베인. 오셨어요?"

 

"온 지 꽤 됐지. 못 들었나?"

 

"요리에 너무 집중했나 봐요."

 

거짓말. 둘 모두 그것이 거짓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감히 제가 있는 자유회에 기어들어 와 최상부의 정보까지 빼내 가려고 한 인물이, 심지어는 저와 맞붙어 한 수도 밀리지 않고 버텨낸 그가 범인凡人과 같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종소리 한 점 울리지 않도록 고요히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기민하게 제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겠지. 그럼에도 베인은 그의 작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주기로 결심하곤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만들고 있었지?"

 

"오늘의 특별 메뉴. 단골들만 알 수 있는 거예요. '늘 먹던 걸로 줘' 같은 거죠."

 

"그런 건 별론데. 나만이 먹을 수 있는 걸 줬으면 좋겠군."

 

"아쉽지만 그건 다음에 해줄게요. 오늘은 손님이 한 명 더 찾아올 것 같아서."

 

"'그 자'를 말하는 건가?"

 

루는 곧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박하 몇 잎을 뜯어 올리곤 치즈를 곱게 갈기 시작했다.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베인은 특별히 기분이 나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온다고 해서 내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저를 경계하는 것만큼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치 백년가약이라도 맺은 듯 온전한 일대일의 소유권을 주장하려 드는 게 우습기도 했다. 질투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베인은 톨비쉬의 존재와 그의 관계를 찢어 놓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루의 관심을 끄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날 이후 루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고, 여전히 나긋하고 다정한 밀레시안으로 남아 있었지만, 가끔씩 내보이는 색다른 면모가 저를 흥분시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은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서빙을 하는 루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탁자로 다가갔다.

 

"미리 말해두는 건데, 가게 안에선 싸우지 말아요. 괜한 소란 때문에 다른 이웃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거든요."

 

"보통은 내가 시비를 걸리는 편에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지."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요."

 

"알겠어. 나보단 그 녀석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게 나을 텐데."

 

"톨비쉬에게도 일러둘 거예요."

 

베인은 제 목에 걸린 넥타이를 정돈하던 손을 뻗어 모로 앉은 루의 뺨을 슬며시 간지럽혔다. 루는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지만 불쾌하진 않은 듯 가만히 그 애정을 받아들였다. 이 정도는 허용 범위인 모양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어깨선을 타고 흘러 내려와 손을 찾아 잡고는 마디를 하나씩 더듬어 붙잡았다. 마침내 잘 다듬은 연분홍빛의 손톱을 보며 입을 맞추곤 그 기색을 살폈다. 루는 이것이 무슨 의미를 담은 행동인지 이해하려는 듯 눈을 한 번 깜빡였으나, 역시나 큰 변화는 없었다. 어디선가 달큰한 향기가 풍겼다. 아직 와인은 개봉하지도 않았는데도. 베인은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사락거리곤 예쁜 머리색이라고 생각했다. 온기를 한껏 담아 꾹꾹 눌러 만든 것만 같은 색깔 내지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면 느낄 법한 감정의 색채. 찬란한 빛이다. 정작 그런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차디찬 골목 어귀에 버려졌고, 그보다 더 쓰디쓴 현실을 맛보며 살아온 탓에 냉정한 시선을 품고 있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 반짝이는 무대 위에서 조명을 한껏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사내가 칼을 품고 있다는 것은.

 

"친모가 가수였나? 그대를 닮은 사람을 스크린 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

 

"몰라요. 어머니 같은 건. 내 가족은 할아버지뿐이고."

 

"뿌리가 궁금하진 않고?"

 

"궁금해야 하나요?"

 

베인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종종 보여주는 이 작태가 자극적이기 짝이 없어서. 그러나 루는 다시금 평소의 유한 태도로 저를 가장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주제였다는 듯 자연스레 제가 준비한 요리 코스의 순서를 끼적거렸다. 언제쯤 저 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강렬한 충동, 그것이 나를 집어삼켰으면 해. 베인은 아예 넥타이를 풀고 몸을 숙여 그가 하는 말들을 듣는 시늉을 했다. 물론 오늘의 메뉴가 소고기든, 양고기든, 아니, 하다못해 사람의 팔다리를 썰어 만들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설명하려 드는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감상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이대로 깍지를 낄까? 그런 후에는 사랑한다고 말할까? 그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내게 예속하고 싶다고 속삭일까? 베인은 턱을 괸 채 그가 손을 놀리는 대로 눈동자를 굴렸다. 메모지 대신 낙서를 잔뜩 적은 냅킨이 잉크로 젖어 얼룩이 번져 나갔다. 샐러드에 레몬 대신 자몽을 올렸어요. 거기까지 말한 루의 손등 위로 컵을 기울여 물방울을 흘렸다.

 

"앗. 자몽이 싫은 거예요?"

 

"나를 봐주지 않아서."

 

"어린애인가요? 유치해."

 

"나만 봐준다면 어린애가 아니라 다른 것도 될 수 있지."

 

"거절할게요. 저는 지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무언가 변하는 걸 원치 않아요. 제게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미리 차단해두고 싶네요."

 

베인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며 일어서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미 모든 장사가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꼭 문을 열려 드는 사람이 종종 있긴 했으나, 그 두드림의 단정한 박자는 이 안에 이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톨비쉬구나. 둘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같은 이름을 떠올리며 행동을 잠시 멈췄다.

 

그는 폭우 탓에 거의 망가진 우산을 접으면서도 조금도 젖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낯이었다. 남자는 제일 먼저 루를 보며 환하게 웃었고, 그 후엔 베인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그 이상의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찾아온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다만 그럼에도 그 존재를 인지하자 참을 수 없었는지 불퉁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왜 여기에 있지?"

 

"먼저 초대를 받아서.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예의가 아니잖아."

 

톨비쉬는 무언가 거칠게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리곤 아예 고개를 돌려 루를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등장 탓에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장미꽃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루의 머리색을 꼭 닮은 것이었다. 여름철의 햇빛을 받아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분홍빛이 물든 연한 금색의 장미가 제비꽃을 닮은 작은 보라색 꽃과 함께 싱그러이 꽂혀있었다. 루가 그것을 보며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다름 아닌, 가격이었다.

 

"비쌀 텐데요."

 

"루에게 주는 거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투박한 만듦새의 새빨간 장미 백 송이와 안개꽃의 다발은 어디에나 흔한 물건이었다. 길거리의 어느 꽃가게를 들어서도 제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형태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색을 띠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바다 건너까지 공수해 와 장인의 섬세한 세공까지 거치지 않은 이상에야 이런 구룡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종류의 것, 그리고 물론 그런 노력이 무상하게도 수요가 전혀 없는 곳이 이곳, 구룡이었다. 세 평도 간신히 채울까 말까 한 채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치품을 살 여유가 없었고,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가진 사람은 대개 흑사회 조직원이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꽃은 개인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는데. 톨비쉬는 알아봐 준 것이 기쁘다는 듯 다가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원한다면 전부 보석으로 깎아 꾸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가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이 정도로 충분해요. 고마워요. 우리가 식사할 이 식탁에 꽂아둬도 될까요?"

 

"물론이죠. 화병을 가져다드려도 되겠습니까?"

 

루의 선선한 끄덕거림과 함께 톨비쉬는 목적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게에 한두 번 들락날락한 것이 아닌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세 사람이 모여 마주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 톨비쉬도 개인적인 방문이 잦았던 게 분명했다. 그는 창고 대용으로 사용 중인 쪽문 너머로 사라지더니, 이내 다시 옥빛의 화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것에 물을 채우고 꽃을 넣어 탁자의 한가운데에 올려놓자 주변이 좀 더 싱그러운 느낌으로 가득 찼다. 조명을 받은 꽃병이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빛을 흩뿌리면, 톨비쉬가 마지막으로 탁자에 앉아 자리했다. 아슬아슬한 세 사람의 공존 속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베인이었다.

 

"담배 하나 피우겠어? 물론, 그대도."

 

"나쁘지 않겠네요. 궐련이 조금 더 취향이지만⋯."

 

"⋯그래."

 

먼저 흡연을 권한 베인도 품속을 뒤지다 묘한 눈길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 내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정도로 비이성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루도 의외라는 듯 내밀던 손을 조금 까딱였다. 톨비쉬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넘기라는 듯 턱짓을 했다.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가 먼저 장초를 입에 빼 물었고, 마지막으로 루가 입술에 갖다 댄 것을 본 그들이 제 정장 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괜찮아요, 여기 성냥 있어요. 제 건 제가 직접 불붙일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선택 받고 싶습니다."

 

"그럴까 봐 미리 거절하려고요. 톨비쉬, 오늘 하루는 싸우는 거 금지랍니다."

 

이름이 불린 남자는 영 대답하기 싫은 듯 입을 잠시 다물다가 가벼운 재촉에 마지못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인은 느지막이 연기를 흘리며 재떨이를 끌었다. 담배만 피우자니 영 심심한 맛이 없잖아 있었다. 달러 지폐를 말아 태우는 즐거움이 있는데. 톨비쉬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손가락에 걸어 재를 털고는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이렇게 질 낮은 건 아주 오랜만에 피워보는군요. 묵직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고."

 

"러시아야말로 보드카에 물을 안주로 타 마시는 것에 익숙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온실 속 화초처럼 섬세하게 컸나 보군?"

 

"귀한 물건일 수록 목 넘김이 좋으니 안주로 맛이 가릴 필요가 없어서."

 

"그만. 또 싸우려는 거죠. 방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톨비쉬, 그보다 많이 늦으셨네요. 원래 더 일찍 오는 사람이잖아요. 지각하는 건 처음 봤어요."

 

"아, 오래 기다렸나요? 미안해요. 사과가 늦었군요."

 

그는 몇 번 입에 대어본 시늉도 하지 않은 필터를 재떨이에 대고 지져 끄며 오늘 점심으로 먹었던 음식의 이름이라도 얘기하듯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는 길에 자유회와 싸움이 붙은 걸 처리하고 나니 양복에 피가 튀어서 급하게 새로 맞춰 입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자유회란 말에는 베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무어라 하는 대신 길게 숨을 빨아들이며 그 이상 아무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 나가자마자 총을 꺼내 들어 이마에 구멍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루가 보고 있으니 둘 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내색하지 않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루는 어렴풋이 그들의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으나 구태여 언질을 줘 막으려 들기보다는 에둘러 그러지 말라는 뉘앙스로 타이르곤 식사를 권했다. 직접 나서서 무력으로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쫓아다니며 막을 방법도 없고, 그렇게 된다면 베인은 외려 그 점이 좋아 날뛸지도 모른다. 루는 아직 훈기가 남아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더 식기 전에 들어요. 제가 정성껏 만들었는데 한 입도 대지 않고 갈 거예요?"

 

"루는요?"

 

"그대는?"

 

"전 입맛이 없어요. 점심을 너무 늦게 먹어서."

 

"그래도요. 당신이 만든 음식이 훌륭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가 식사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먹지 않는 모습을 보니 신경이 쓰인 톨비쉬가 제 몫의 면을 포크에 말아 내밀었다. 루는 고개를 저으며 입가를 살풋 가렸다.

 

"대신 이따 후식에서 같이 먹을래요. 정말 배부른 거니까⋯."

 

베인은 가장자리에 밀어두었던 와인을 열어 잔을 채우곤 스왈링을 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남자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핏빛의 액체가 아슬하게 넘실거렸다. 그는 단숨에 들이킬 것처럼 굴어놓곤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병을 돌려 라벨을 확인했다. 18세기 경에 나온 샤토 라피트.

 

"그럼 대신 이거라도 마시지. 임무 값으로 받은 건가? 다음엔 로마네 콩티라도 요구하는 게 어때. 그대는 고작 이런 술로 가격을 치기엔 영 아쉬우니까 말이야."

 

"마침 제게 45년산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당신과 마시고 싶었는데, 감히 내게 당신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도 될까요?"

 

루와 톨비쉬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는 극광의 결을 하나하나 손수 깎아 만든 것처럼 영롱한 눈길이 닿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기꺼운지 잔잔하게 웃은 남자가 몸을 붙여 이마에 가벼이 키스했다. 턴테이블이 튀는 소리를 내며 미세한 소음을 일으켰다. 그는 자잘한 방해만 아니었다면 입술에 직접 맞부딪치고 싶었다는 듯 손으로 매만지며 바른 자세로 돌아갔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날까요. 아니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베인이 톨비쉬의 얼굴에 대고 연기를 거의 내뱉곤 담배를 지져 껐다. 곧은 이마가 찌푸려지며 미간이 좁혀졌다.

 

"나랑 데이트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셋이 오붓하게 보내야 하나? 식사는 글렀으니 후식부터 꺼내 보는 게 좋겠어. 어느 쪽이 좋지?"

 

"또 저급한 말을 하는군. 루, 비가 그치는 것 같은데 다시 내리기 전에 떠나죠."

 

눈을 둥그렇게 뜬 루가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고민하다 영 엉뚱한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식사만 대접하려던 거였는데요. 그 말은 들은 베인이 웃음을 터뜨리고, 톨비쉬는 못 이기겠다는 듯 결국 따라 웃었다. 당신은 늘 한결같이 순수했었는데 그걸 모르고. 남자는 양손을 모아 간단히 식사 기도를 올리며 읊조렸다.

그럼, 이만 식사할까요. 잘 먹겠습니다.

 

 

 

 

 

 

©시오님(@Leadme_cr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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