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을 만들어볼까.
유니콘의 뿔 십 그램, 하늘에서만 자란다는 복숭아 두 조각, 그리고 누군가의 미련과 눈물을 담아서.
그렇게 당신께 전해볼까.
담장 위를 가볍게 밟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가 뛰듯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무언가 지나간 자리로 작은 돌들이 떨어지는 듯했으나 그것에 주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 사이로 얼굴을 가린 몇몇이 수상한 인물들이 녹슨 창고를 드나들었다. 음산한 분위기임에도 느슨한 낯이 나타났다. 심지어 몇몇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것이 거나하게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일상적인 일이다. 구룡 반도에서는.
다시금 문이 열리고 닫혔다. 새벽 두 시 십분. 교대 시간이다. 이미 공권력과 손을 맞잡은 채로 움직이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래도 염치가 있는 건지 중요한 물건은 으슥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다니곤 했다. 가령, 높으신 분들이 손을 대는 약 같은 것들. 혹은 유실된 것으로 발표된 도굴품처럼 귀하고도 귀찮은 물건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어떤 사유로든 그런 것들은 낮에 나와선 안 될 물건이었고, 그러니 그것들은 새벽의 어둠을 타 누군가의 손과 손으로 이어져 바다를 건넜다.
진정한 무법지대는 물 위에 있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것들은 모조리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라앉아 멀리 떠나가 버렸고, 배는 일종의 외딴섬이 되어 잡히지 않는 선을 맴돌며 국경을 가로질렀다. 밀항을 위해 준비된 배가 채도 없는 불을 밝히며 옅게 깜빡였다. 곧 출발한다는 시그널이었다. 이제 저것은 감히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 되겠지. 중년의 남성은 목장갑을 낀 손을 부딪쳐 먼지를 탁탁 떨어냈다. 실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그는 이 일대에서 제일 잔뼈가 굵은 이였다.
요는, 평생 나쁜 일이라곤 거짓말조차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을 가져선 온갖 더러운 일들의 온상을 전부 주무르고 다닌 행동대장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밀레시안의 표적물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보일 새라 모자를 푹 눌러 써 그 색을 가린 이가 방아쇠 위로 손을 올렸다. 그는 군용 소총을 들고 있었다. 이런 일에 라이플까지 들고 올 일은 아니었지만, 또, 평범한 리볼버나 글록을 쓸 필요도 없어서. 밀레시안은 사냥감의 거리가 멀수록 좋았다. 사람을 죽이면 피가 나온다. 벨 때와는 또 다르다. 핏자국이 산발적으로 이리저리 튄다. 요리를 할 적에도 사후경직이 끝난 고깃덩어리를 물속에 푹 재워둬 완전히 핏물이 빠진 뒤에야 만지는 그에겐 생경한 혈향이 내킬 리 없었다. 그런 건 우아하지도 않았고, 맛있지도 않았다. 그런 데에 별다른 의미나 이유를 부여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앞치마 위로 핏자국이 남는 건 유독 청결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생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때로는 인테리어를 포기할 정도로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밀레시안은 제 식당 안에 연꽃 모양의 트롤리를 놔두고 싶었지만, 갓 구운 빵들은 이물질이 들어갈 수 있어 반드시 덮개를 두어야 했다. 이런 곳에서 그만치 신경 쓰는 게 더 신기한 일이라지만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완벽해야 한다. 그것이 고작 튀긴 가죽 구두일지라도.
머리통이 점점이 멀어졌다. 이제 스코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손톱보다도 작은 사이즈였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시야각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트리거를 당기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밀레시안은 더 고민하지 않고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소음기를 장착하고서도 제법 큰 소리가 났다.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며 총알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비명이 터지고, 몰려있던 사람들이 놀란 개미 떼처럼 재빠르게 흩어졌다. 밀레시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며 차례차례 인간 개미들을 터뜨렸다. 배는 출발하지 못할 것이다. 광란적인 현장도 조직원 간의 세력 싸움으로 치부되어 괴담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혼란이 곧 질서인 세계란 늘 그런 식이다. 밀레시안은 너무 많은 총알을 발사해 달아올라 연기를 내뿜는 총구에 가볍게 바람을 불어 매캐한 열기를 흩날렸다. 치우는 일까진 제 몫이 아니다. 이번엔 청소부를 붙여주었다. 평소와는 달리 처리할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겠지.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온몸을 가린 사람들이 삽시간에 나타나 골목을 쓸기 시작했다. 그는 올라섰던 담장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벼운 소리가 났다. 무게가 제법 있는 고양이가 달려가는 정도 만큼만. 답답했던 복면을 내리고 모자를 벗자 잘 익은 풍요의 밀밭 같은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드문드문 깨지지 않은 가로등 아래 빛나는 것들이 그의 머리 위로 연분홍색의 원색 또한 존재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새벽 두 시 사십오분. 반 시간쯤 가만히 숨을 죽여 몸을 굳히고 있었더니 팔다리가 조금 아릿했다. 손목을 부드러이 몇 번 주무르곤 비포장도로 위까지 구태여 수고롭게 끌고 온 캐리어를 열어 약병과 옷가지를 헤친 뒤 그 안에 소총을 분리해 집어넣곤 다시 지퍼를 닫아 무거운 자물쇠를 채웠다. 공항에서 마지막 야간 비행기 노선을 탄 후 24시간 영업하는 간이 국숫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곧장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온다면 지금쯤 시간이 될 것이다.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일부러 묻히고 온 마른 향신료의 향도 아직 남아 있었다. 국수의 국물을 우릴 때 종종 넣는 재료였다. 어차피 좀 허술하다 해서 집요하게 가방을 뒤질 사람은 없었지만, 깔끔함은 그의 가치와 직결되었다. 거금을 들여 고용해주었으면 그만큼 값어치를 해주어야지.
그는 저 자신이 디저트와 같은 피고용인이라고 생각했다. 싸구려 음식으로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영양분 하나 없는 음식물 찌꺼기여도. 하지만 사람들이 별다른 맛도 느끼지 못할 걸 알면서도 식용의 금가루를 뿌려 귀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나. 적당한 골목 어귀로 들어가 가방을 세우곤 그 위에 걸터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독하기만 하고 풍미 하나 없기로 유명한 담배가 튀어나왔다. 일용직으로 몸을 쓰는 일꾼들이 선호하는 브랜드였다. 저렴하지만 확실하지. 폐 끝까지 밀어 넣는 니코틴과 타르, 일산화탄소와 포름알데히드 같은 것. 입에 물고 불을 붙이기 위해 다시 겉주머니를 뒤지면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담배가 쑥 빠졌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톨비쉬였다.
"왜 이런 시간에 여기 있나요, 루?"
"내가 물을 말이었어요. 특히나 이런 곳엔."
"당신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접어 꺾더니 제 외투를 벗어 밀레시안의 어깨 위로 덮어주듯 걸쳐주었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여름 코트에선 무거운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비가 오는 날에 쓸 법한 향이었다. 우드 향과 머스크. 비 소식이 있나 보지. 그의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으나 분명 제 개인 수행원을 두어 저를 따라가게 시켰을 게 분명했다. 너무 일찍이 붙이면 눈치를 금방 채 버릴 테니까 얼추 생활 반경 근방에서만. 그럼에도 밀레시안은 그가 어디서부터 제 뒤를 쫓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골목에 들어온 것부터가 유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톨비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를 위해 서로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쇼윈도 부부가 의무를 다할 때처럼. 다만 다른 점은 그들의 관계는 어떠한 활자와 도식으로 묶여있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서서 그것에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톨비쉬는 제가 욕심낼 수 있는 위치를 아주 잘 알았다. 다정한 남편을 추구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그는 제 안주머니에서 새로운 담뱃갑을 꺼냈다. 진짜 남편이라면 피우지 못 하도록 말려주지 않을까. 밀레시안은 그것이 왠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달싹거렸다.
"고생 많았어요, 루. 이걸로 피우시죠."
"톨비쉬는 이런 걸 즐기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도요."
"그대를 위해 준비하고 있죠. 늘…. 그 외에도 뭐든지."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요?"
"뭐든. 정말로…, 뭐든."
유순한 눈동자가 휘어지며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 말이 기꺼웠다. 더 정확히는 기특함에 가까웠다. 칭찬을 속삭이듯 입을 오물거리자 그 아래에 콕 박혀 있던 점이 같이 움찔거렸다. 톨비쉬는 그것에 제 입술을 맞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허리를 숙여 라이터를 내밀었다. 밀레시안은 새로운 연초를 꺼내 물고 입술을 내밀었다. 남자는 제법 본능적인 욕구를 밀어 누르며 가볍게 불을 놓았다. 시야 앞이 잠시 환해지는가 싶더니 도로 어두워졌다. 발간 불 댕기가 잿가루와 함께 작은 연기를 피워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베인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몸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다. 웬일로 변덕을 부려 대화할 시간을 남겨두는 걸까. 밀레시안은 습관처럼 왼쪽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꽂았다. 낮은 한숨처럼 연기가 흘러 나와 금세 흩어져 버렸다.
"그럼 머리 장식을 좀 사주면 좋을 것 같아요."
"핀이 좋습니까? 끈이나 머리띠도 괜찮습니다. 단순하게 꽂는 형태의 것이나 비녀도 유행이더군요."
"안경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안경줄이 조금…, 심심한 것 같아서."
"그대의 미모가 곧 제일 아름다운 장식과도 같아서 사줄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군요."
그 말에는 밀레시안이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진부하게도 입에 발린 말 같아서.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진심을 담아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가끔은 이런 촌스러운 말들도 달콤하게 들릴 때가 있었다. 물론 그 감정은 솜사탕보다도 빠르게 녹아내렸고, 그조차도 매우 미미하고 단조롭게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것이라 별달리 유난스러운 마음을 느끼기엔 어려웠다. 내가 조금 더 격렬한 성장통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당신에게 사랑을 느꼈을 텐데. 하지만 밀레시안에게 감정이란 자라나기도 전 찢겨 나간 귀퉁이와도 같았다. 아주 어릴 적…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다정하게 주름진, 보다 더 따뜻할 수 없었던 손이 사라졌을 때….
"그런 말을 싫어하던 때도 있었죠…."
이미 모두 지난 이야기다. 심지어는 그 또한 지나치게 씁쓸하거나 비틀린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정말로 전부 꺾여 나간 것이다. 어딘가 고장 난 것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때로 아주 가끔 사랑받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도, 홀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수족관을 말없이 바라보고 나면 그걸로 족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아마 앞으로도.
톨비쉬는 미안한 눈치를 지었다. 밀레시안은 손을 내저으며 사과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질책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다. 이제 더는 검은색의 머리칼을 가장하지도 않고,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그런 생각이 났을 뿐이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안경줄을 뭉근히 눌러 간지럽혔다. 어떤 것이 어울릴지 고민하는 낯이었다. 천 조각을 길게 늘어뜨려도 좋겠지. 열대어의 지느러미처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우아하게 나풀거리도록. 아니면 비즈들을 좀 더 달아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도 좋을 것 같았다. 너무 시끄러우면 안 되겠지만. 밀레시안이 고개를 조금 틀어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톨비쉬는 제 생각에 빠져 들어 집중하고 있었다. 들여다보기 위해 숙였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밀레시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눈과 눈이 얽혀 시선이 맞부딪쳤다. 푸른 눈동자가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잔잔한 호수 같던 그 눈이 무어라 격렬한 것을 내비치는 그 순간, 생각보다 미지근한 열감이 입술에 와 닿았다. 약간의 강제력이 있지만 아주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듯 잠시 기다리는 공백이 생겼다. 밀레시안은 그 의미를 읽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밀어내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그것을 승낙의 뜻으로 받아들인 듯 혀가 밀려 들어왔다. 입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축축하고 뜨거웠다. 그때까지도 밀레시안은 그다지 좋은 향만이 나진 않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담배 냄새가 그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닌데. 외려 마주친다면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피하는 그런 것이지.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좀 더 깊숙하게 넘어오는 온기가 숨을 틀어막았다. 남자는 밀레시안의 뒷덜미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감싸 덮으며 끌어안았고, 안긴 이는 오른손을 높고 곧게 뻗어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황홀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숨이 조금 막혔다. 입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쁘게 헐떡거리는 소리를 냈다. 몸이 점점 밀리며 가방이 기울어졌다. 떨어질 것만 같아 팔에 힘을 주며 버텨냈다. 머리카락이 뺨과 눈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눈을 꾹 감았다. 그냥 아예 매달려 안기는 게 나을까 싶어지려면 드디어 몸이 떨어졌다. 늘 단단한 인상의 사내가 어딘가 조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극히 본능적인 열기로 달아오른 볼 위로 손이 올라오다 떨어졌다. 그는 조금 쉰 목소리를 냈다.
"놀랐겠네요."
"아뇨."
괜찮아요.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밀레시안을 일으켜 세웠다. 구겨진 옷을 털어 펴주던 그가 천천히 손을 멈췄다. 방금까지도 다정한 손길로 매만져주던 것이 거짓말처럼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가 무뚝뚝하게 목소리를 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인영이 드리웠다.
"베인. 언제까지 지켜볼 셈이지."
"방해하지 않길 바라던 거 아닌가."
그림자처럼 모든 어둠을 흡수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듯 그저 지나가던 것처럼 빙 둘러 길을 돌아오고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듯 멈추어 섰다. 시야가 가로 막힌 밀레시안은 안경을 고쳐 쓰며 예의 상냥한 미소를 가장했다. 예상치 못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 오히려 예상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건 반갑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랬듯 건네는 인사엔 유감도 무엇도 없이 다정함만이 깃들었다.
"좋은 새벽이네요, 베인."
"아, 그래. 좋은 새벽이지. 엊그제 저녁에도 만났는데, 벌써 또 만나는군. 그대는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벌써 수척해진 것 같아. 혹시 톨비쉬가 괴롭히나?"
"농담도…. 얼마나 잘 해주는데요."
"쓸데없는 소릴 할 거면 그대로 지나가는 게 좋겠군."
베인은 상반되게 갈리는 태도에도 개의치 않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그를 도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처럼 더 다가서 손을 내밀어 밀레시안의 입술을 잠시 눌렀다. 여즉 남아있는 열락의 흔적이 잠깐 스치고 지나쳤다. 남 보기에 아주 당당한 일들은 아니라 한들, 그렇다 하여 아주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 또한 아니었건만 그 손길에는 묘한 힐난이 들어 있었다. 왜 이런 곳에서 그런 것을 했냐는 듯. 밀레시안은 그 감정을 금방 눈치채 읽었으나 그가 이러는 이유까진 이해하지 못해 가만 그것을 지켜보았다. 톨비쉬와 베인의 관계가 서로 간 우호적이진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근본적인 소유욕과 독점욕이 저와 맞닿아 있는 이유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그 둘을 보며 사랑이란 건 어디에 가둬놓고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을 적에 해소되는 감정이라고 느꼈다.
저는 품을 수 없는 마음이다. 라일락, 내지는 제비꽃 같은 눈동자가 무엇보다도 건조하고 무미한 빛을 내며 베인을 올려다보았다. 베인은 그 시선조차도 충분히 황홀하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을 담아 만든 것처럼 생겨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아 빈 껍데기와 같다니.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갖지 못하는 쪽이 좀 더 유쾌하겠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가 도발하고 싶은 건 톨비쉬가 아니었다. 밀레시안이지. 저 눈동자에 타오를 듯 한, 그리하여 끓어 넘치는 생동의 영혼을 담고 나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감히 그 어떤 생도 넘볼 수 없는 그것들이 오로지 나를 향해 직격으로 날아올라 부나방처럼 덤벼든다면.
물론 구태여 비유하자면 그보다는 저 자신이 하루살이에 가까운 생이었다. 무력으로도, 어떤 가치관으로도. 기꺼이 하루만 살아도 좋았다. 평생의 지난한 시간을 품어 끝없는 괴로움에 몸부림 쳐야 한다면 단 하루의 쾌락이 훨씬 더 좋았다. 여전히 허공에서 맴돌던 손이 천천히 어깨로 내려가 앉아 그 선을 타고 올라갔다. 힘껏 뻗으면 전부 잡힐 것만 같은 한 줌 목을 쥐어 속삭였다.
"어딜 다녀왔지?"
"재료를 보러 다녀왔죠. 야시장이 있으니까…."
"오늘은 쉬는 날인데."
"가게가 단 하나만 열려도 충분히 야시장이에요, 베인. 이곳엔 당신이 모르는 곳도 아주 많아요."
"아니야, 그대. 뭔가 착각하고 있어. 자유회 손아귀 아래 허락받지 못한 가게는 없어. 이 땅이 곧 나의 영역이야. 내 눈과 손이 닿는 모든 곳들이."
아주 조금 가빠진 숨을 타고 동맥이 생리적인 경고를 알리며 팔딱거렸다. 밀레시안이라고 해도 별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무던하다 못해 무감한 낯으로 그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손을 치워내려면 얼마든지 치워낼 실력도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톨비쉬가 나서 거칠게 손을 떼어냈다.
"이 자리에서 나와 사생결단이라도 내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그 소원을 들어주지."
"그럴 리가. 물론 그쪽도 나쁘지 않게 흥미롭지만…. 나는 루가 뭐라도 해주길 바란 건데. 그쪽이 맞지 않나? 나를 진실로 짓이겨 죽일 수 있는 실력자는 루뿐이란 걸. 그쪽과 싸우는 건 금방 지루해질 테니까 말이야."
밀레시안은 제 이름이 불리는 것 또한 가만 들으며 손장난을 조금 치다가 이미 반쯤은 타버린 담배를 다시금 입에 물어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는 나긋한 웃음을 지었다.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도 주변이 엄청나게 환해지는 미소였다.
"저는 사람을 못 죽여요. 평범한 식당 주인인데요."
두 사람 모두 반박하지 않았다. 베인은 당장이라도 그가 깔고 앉은 캐리어를 열어 이것 보라며 채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열기 전까지 알 수 없었으며, 역설적이게도 그럼으로써 모두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루는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민 베인의 손등에 담배를 지져 꺼 끄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자신 있는 건 어떤 고수가 좀 더 싱싱한 녀석인지 골라내는 거죠. 노랗게 된 건 쓸 수 없어요. 이미 상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당연하게도 시든 녀석들은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또…. 줄기가 너무 억세도 먹지 않고 남기니까 그 밑동을 신경 써서 잘라주어야 해요. 참, 향이 독특해서 호불호가 있으니 반드시 그 둘을 같은 도마로 조리하면 안 되는 것도 잊지 말고요. 다른 채소를 골라내는 법도 알려드릴까요?"
"…하하!"
"…?"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베인이었다. 그다지 그들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말들을 도란도란 전부 신중히 경청하고 있던 톨비쉬가 웃고 있는 남자를 흘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저럴 땐 꼭 영락없이 정말로 카페 겸 식당을 운영하는 평범한 거주민 같아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저 천사 같은 얼굴에 또 속을 뻔했다. 정말이지 흥밋거리가 끊기지 않고 나오는 화수분 같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저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올까? 그도 남들과 다를 것 없는 내장을 가졌을까?
"그래, 그렇다면 다음 식사는 좀 더…. 근사한 걸로 준비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를 들면요?"
"고작 돈 좀 쥐여주면 얻을 수 있는 고기로 되겠어?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식자재라던가."
"사람을 재료로 쓰면 별로 맛있지 않을걸요. 물론 포만감을 원해서 식사하는 게 아닌 이상 오직 그 음식의 가치만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급 디저트처럼."
"그럴까요…."
고급 디저트처럼. 그 말을 따라 곱씹은 밀레시안이 말간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는 음식이 아닌 저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톨비쉬의 코트를 돌려 주고는 낡은 캐리어를 끌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날을 새고 싶지 않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따라오세요. 대접해 드릴게요."
"뭐든?"
"뭐든."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니 궁금해지는데. 그럼 가볼까."
베인이 제일 먼저 그 뒤를 따랐고, 이어 톨비쉬가 발걸음을 옮겼다. 밀레시안은 저만이 만들 수 있는 요리 몇 가지를 머릿속에서 추려냈다. 나오기 전 물그릇에 담가둔 버섯도 소스를 절이기에 쓸만했고,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레시피대로 손수 만든 라임 청도 괜찮았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오려는 것 같으니 그에 걸맞게 은은한 향으로 입맛을 사로잡아야겠다. 오늘의 첫 손님은 두 사람이다. 간밤의 일들은 모두 한여름 밤의 꿈결처럼, 악몽처럼,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새벽녘 길이 아스라이 밝아왔다. 아침이 되어 슬슬 사람들이 돌아다니는지 골목 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넥타이를 동여맨 채 회사로 향할 테고, 누군가는 밤이 되길 숨죽여 기다릴 테고, 또 어떤 누군가는 부지런히 과일을 씻어 매대에 올려놓을 테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어서오세요. 밀레시안의 식당에.
©시오님(@Leadme_cr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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