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binogi

[디스아스터] White Christmas

ㄲr람 2024. 12. 9. 22:23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그러고 싶더라고요.  특별한 날이라 그랬던 걸까요? 

사람들의 환호와 뒤엉킨 종소리 같은 것들이 저를 들뜨게 만든 걸까요? 이것 또한 기적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올해에도 죽지도 않고 또 찾아온 날에 바치며.

메리 크리스마스.

 

 

 

 




 

 

 

그는 아주 오래간 그곳에 서 있었다. 아마 정확하진 않지만 처음 그를 본 것은 아침이었다. 동이 막 틀 즈음 어슴푸레한 빛이 머리 위를 감돌고, 그 복숭앗빛 머리칼이 덜 익은 풋내기의 색을 지닐 때부터. 나는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으므로 곧 그를 잊어버렸다. 이른 시간부터 대로에 나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바쁜 하루를 시작하며 숨돌릴 여유 없이 어딘가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는 뜻이었기에. 응당 오이 샌드위치라고 불러야 걸맞을 법한 사과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간단히 때울 때엔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오늘 출근길에 굉장한 미인을 봤다는 자랑스러운 목격담 정도가 되었으나 그것이 내게 깊은 상흔을 남길 만큼 특별한 경험이나 추억은 되지 못하였다.

 

그는 기껏해야 유명한 영화배우조차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러니 내가 그를 상기한 것은 늦은 퇴근길의 뒤엉킨 차도 위였다. 나는 아직 자가용을 구매하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에 한때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은빛의 세단이 내 옆을 지나치는 것을 보며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연말의 바쁜 일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조차 믿어본 적 없는 먼 이국의 누군가가 태어남을 축하하는 휴일을 기념하며 숨돌릴 시간을 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축하의 생크림 케이크를 고민하고 있으려면 땅과 땅을 잇는 육로 어드메 중간에 위태롭게 서선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도 무엇도 알 수 없었으나 그런 부드러운 금빛의 머리를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게 잊고 있던 가십의 당사자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마치 조각상 같았다. 이미 도시의 상징과 하나의 유려한 피조물로 인지되는 것의 일종 말이다.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더 정확히는 이 구룡이라는 반도, 더 넓게는 지구라는 곳 안에.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 사실이 너무나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이 없으나, 감히 고해하자면 그는 모두의 축복을 받아야 마땅한 휴일의 주인공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 부근에서 제일 유명한 컴퓨터 조립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신앙이니 뭐니 하는 그런 미신들은 모두 우스운 것으로 치부한 채 최첨단의 길을 걷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아주 잠깐이나마 신이 존재함을 믿고 만 것이다. 그는 이방인처럼 하염없이 야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그가 잠시 입을 열었다.

 

라고.

 

나는 듣지 못했다. 때마침 들린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을 뿐이다. 아, 그렇지 참. 여긴 곧 크리스마스고, 온 곳곳에서 캐럴이 끝없이 흘러 나오고 있는 도시 한복판이었다. 구세군의 종이 딸랑거리며 청각을 자극해 잠시 정신을 빼앗긴 사이, 다시금 바라본 그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미약한 온기와, 그로 인한 싸늘한 그림자를 남기고. 무언가 있다 빠져나간 것처럼 남은 자국이 내가 본 것이 신이 아님을, 그로 인해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이 다녀갔음을 알게 해주었다. 많은 인파가 쏟아졌다. 올해도 죽지 않고 돌아온 메리 크리스마스를 위해.

 

 

 


 

 

 

 

밀레시안은 습관처럼 제 뺨께를 어루만지며 반죽을 다듬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은 손님이 있는 날이었다. 늘 그렇듯 서로를 불청객으로 여기면서도 암묵적으로 수긍하는 이들. 밀레시안은 그들이 제 앞에서 주먹질을 해대며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라고 해서 어찌 모르겠는가, 그들이 괜한 감정을 소모하며 보이지 않는 알력을 주고받고 있는 것을. 다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고 제 말을 진실로 들어줄 리 없으며, 뒤를 돌아서는 순간 다시 다툴 것이 뻔했기에 그저 본성을 숨기고 억누르려는 모양새만으로도 기꺼워하곤 적당히 모른 체 하고 있었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않느냐는 마음도 조금쯤은 있었다. 정말로 큰 싸움이 된다면 혼내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으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하여간에 두 바보 같은 사내들은 오늘도 기쁜 날을 맞아 이곳으로 오고 있었고, 아무리 식사 후 간단한 디저트의 대접일지라도 그에게는 최상의 상품을 내놓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요리는 그의 자부심이며,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누군가가 제가 만든 것을, 아니, 무엇이든 간에 잘 먹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정성을 담아 내어온 결실이 오랜 기간의 숙성과 인내를 거쳐 노릇해진 한 입 거리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고작 한 뼘만 한 길이의 간식을 위해 장장 이틀을 후숙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기에 그런 음식들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은 외려 즐거운 일이다. 찰나의 반짝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멋진 일이지 않은가.

 

그의 눈동자가 아이싱처럼 빛이 났다. 특별한 감흥도 없이 여상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그가 유일하게 생동감 넘치는 낯을 짓는 순간이었다. 그나마도 평소에 비하면 조금 더 집중하는 듯 골몰한 속눈썹과 벌어진 입의 틈새, 흘러내려도 붙잡지 않는 머리카락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를 잘 알거나 매서운 눈을 지닌 극소수의 몇몇은 그것만으로도 밀레시안이 오늘은 유독 즐거워 보인다는 평을 남길 만큼 드물고 생소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만들어둔 것을 조심스럽게 냉장실에 넣어둔 채 어지러운 조리실을 정리하고 창고를 한 번 더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으면 오늘의 준비는 끝이다. 밀레시안은 계획했던 대로 냉장고 안의 성에를 간단히 깨부숴 털어내고, 케이크 위로 둥근 글라스를 덮어둔 후, 창고의 감자 포대 자루들을 외곽으로 잘 치워두었다. 흙먼지가 묻은 손을 씻고 앞치마에 물기를 닦고 있으려면 약속했던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이르게 도착한 남자가 주방과 홀을 가르는 투명한 유리 벽을 두드렸다. 본디 철문으로 간단히 구역을 나눠 편리성을 추구하는 게 본 지역의 전형적인 인테리어였으나, 제 가게만큼은 꼭 취향으로 만들고 싶어 은은하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위해 물 건너 최신 유행이라는 유럽풍의 부엌을 만든 결과물이었다. 저렇게 손님이 두드리거나 만지면 깨질 가능성이 있고, 아니더라도 손자국이 쉬이 나는 이유로 다들 부러워하면서도 기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는 행동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항상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만 있는 밀레시안이 몸을 바로 펴 조리대 아래에서 빠져나와 상대를 바라보았다.

 

"톨비쉬."

 

"루."

 

그는 오늘도 잘 빗어넘긴 금발을 자랑하듯 조명 아래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가 장갑 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저가 보이지 않으니 부득이하게 두드린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반가운 티를 한껏 내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라는 인사에는 자연스레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며 걸음을 조금 비켰다. 푸른 빛의 눈동자를 따라 그 시선을 흘리면 사각지대에 기대어 있던 베인이 연이어 인사하듯 눈짓을 하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이 비슷하게 들어올 때는 많았지만 이렇게 같이 들어온 날은 처음이었다.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웬일이에요?"

 

"오는 길에 만나서 말입니다."

 

"누가 음습하게 미리 기다린 건 아닌가 모르겠군."

 

"너를 기다려서 얻는 이익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데, 착각도 유분수야."

 

"그만. 기껏 같이 와놓고 싸울 거예요?"

 

가벼운 제지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먼저 장갑을 벗은 건 베인이었다. 그는 아직도 입김이 나는지 확인해보듯 옅고 길게 숨을 내쉬어보다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웃었다. 영상의 온도인데도 밖은 영 추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실내까진 그리 얼어붙지 않은 기온일 텐데. 베인이 밀레시안의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 맞춰 인사를 나누자 그 손을 놓길 기다린 톨비쉬가 뺨에 비쥬를 남겼다. 은근한 승리욕을 드러낸 남자가 그와 반대로 눈부신 미소를 다시 걸치며 저가 운영하는 식당인 것처럼 밀레시안을 에스코트했다. 베인은 입고 있는 목폴라를 손끝으로 집어 가볍게 늘어뜨리다 그 꼴이 우습다는 듯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그 내용이 들리진 않았다. 가벼운 저지레려니. 밀레시안은 손님을 두고 먼저 자리에 앉은 꼴이 되었다. 얼떨결에 상석에 앉아버린 그가 다시 일어서려면 베인이 어깨를 가볍게 눌러 제지했다.

 

"우리가 여길 들락날락한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를까 봐."

 

"제가 대접하는 거잖아요."

 

"그런 게 중요한가? 그대는 고지식한 부분이 있군 그래. 이봐, 톨비쉬. 날이 날인 만큼 아마도 케이크일 텐데 냉장고라도 열어보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이미 확인하고 있어."

 

"잠시만요, 아직 조금 더 놔뒀다가 마무리를 하려고 했어요. 이대로 꺼내면 먹기 어려운 상태일 거예요."

 

"어려운 상태 정도가 아니라 음식이 아닌 걸 내놔도 기쁘게 받아들이지."

 

"그런 건 거절하라고요…."

 

"그것만큼은 동의하는 바군요. 루, 어제오늘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그 자리에 앉아 쉬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베인이 의자 등허리에 팔을 걸치며 과장되게 불량한 태도를 지었다. 답지 않게 쓸모없는 사담을 나누며 계속 붙잡는 걸 보니 밀레시안이 혹여라도 일어설까 봐 미리 막아두는 것 같았다. 저렇게 손발이 맞는 두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마주친 것만으로도 불쾌해하는 것 같더니 오늘만큼은 의기투합한 것이 제대로 작정한 듯했다. 밀레시안은 몇 번이고 부엌 쪽을 힐끗거리다 이내 포기하곤 자세를 잘 가다듬어 앉았다. 무력으로라도 일어서면 강제로 저를 막을 수는 없겠으나 그렇게까지 부딪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 준비했기에 이렇게 요란을 떠나고 싶기도 했고. 베인이 새로 수집한 스포츠카의 기종까지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뒤편에서 와당탕거리며 무언가 계속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밀레시안은 애써 모르는 체 하며 귀 기울여 들어주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뭔가요?"

 

"글쎄. 나도 저 안에서 대체 뭘 하느라 저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뭔가 망가졌더라도 망가뜨린 사람이 전부 물어내 줄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이 기회에 오래된 식기들을 전부 갈아치워도 좋겠지. 요즘 아일랜드풍이 유행하지 않던가? 세공이 아주 섬세하더군. 내 마음에도 흡족할 만큼 괜찮은 디자인들이 아주 많아. 박이라고 하던가. 옛 청 자기 같은 것들 위에 금빛으로 다시 테를 둘러서 만드는 건데…, 오, 이런. 그대가 가도 소용 없을 텐데. 앉아 있지 그래."

 

"그렇게까지 비싼 걸 사봐야 손님들이 깨뜨리면 더 아깝기만 하거든요. 애초에 산 지 얼마 안 된 거라서 지금도 충분히 좋은 물건들이에요. 아무 잔소리도 안 할 테니까 상황을 확인하게만 해줘요."

 

"어이, 톨비쉬. 일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루가 일어났잖나."

 

"곧. 아니, 지금."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베인의 손을 떼어놓고 실랑이를 하던 밀레시안의 시야에 톨비쉬가 나타났다. 베스트와 타이에 무언가를 잔뜩 묻힌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 미완성인 케이크를 대신 만들어주기라도 했나 싶었으나 그것은 눈에 익지 않은 모양새였다. 제가 만든 것은 분명 과일을 잔뜩 올린 생크림 케이크였으니까. 조금 더 베이지 색이 깃든 크림이 잔뜩 둘러싸인 그것은 초콜릿으로 엉성하게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는 케이크였다. 맛보지 않아도 크림에 커피나 바닐라 따위를 섞었지 싶었다. 케이크를 든 톨비쉬가 가까워질수록 글자가 선명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루.

 

루는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가며 눈을 번연히 깜빡이다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웃음소리였다. 정작 준비했던 두 사람조차 이렇게까지 밝은 모습은 볼 줄 몰랐던 듯 놀란 얼굴이었다.

 

"웃을 줄도 아는군."

 

"전 항상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요."

 

"하지만 그대는 그게 무표정에 가깝지 않나? 언제나 가면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다정한 사람이 아주 솔직하게요."

 

"솔직하게…."

 

톨비쉬가 다시 한번 더 강조하듯 읊었다. 솔직하게. 그 단어가 어찌나 생경한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국의 언어처럼 낯설었다. 무언갈 철저히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날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얼굴도 가리지 않았고, 희로애락과 호불호도 얼추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확언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전부일 때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숨기고 들어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정말로 내가 보여주고 드러내는 이것이 전부일 뿐인데. 평소처럼 태연하고 여유로운 미소로 돌아온 것을 본 두 사람이 못내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시답잖은 농담들을 툭툭 던져댔다. 입 밖으로 꺼낸 본인들조차도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어버릴 만큼 재미는 없었으나 루는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싸우던 남정네 둘이 저를 위해 합심하고 다소 엉망인 케이크를 구해왔는데 어찌 거짓된 마음으로 아연하게 굴 수 있을까. 루는 아직까지도 서 있는 두 사람들을 전부 자리에 앉히곤 저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 가볍게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이건 어디서 사 온 거예요? 가져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아무리 사수해도 인파가 너무 많아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보다, 루. 이건 사 온 게 아닙니다. 만든 거죠. 원래 이렇게까지 어설픈 솜씨는 아니지만 좀 급하게 만든 바람에 조금 엉성한 감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만든 사람의 성의를 보고 예뻐해 주면 좋겠군요."

 

"글쎄, 급하게 만들었다기보단 원래부터가 그 실력이지 싶었는데…. 핑계가 좋군. 저 데코레이션 하나 쓴다고 얼마나 손을 떨었는지 아나? 마치 힘 좀 준다고 짤주머니가 곧바로 터져버릴 것처럼 굴더군."

 

"실제로도 그다지 튼튼한 재질이 아니었다. 당장 망가진다면 새로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러는 너야말로 만드는 내내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지 않았나?"

 

"그만, 잘 알겠어요. 둘 다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은 마음껏 즐기기로 해요. 맛은 본 거예요?"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이프를 들어 폭신한 감촉의 스펀지를 자른 채 둘의 접시에 한 조각씩 가져다 놓으면 어째선지 긴장한 낯빛이 스쳤다. 차마 맛이 없으면 어쩌나, 그런 얼굴로. 눈앞에서 피바람이 몰아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니 다시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저 제게 남들이 즐기는 휴일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서, 오롯 그런 순수한 마음이 잘 느껴져서, 마음이 부푸는 기분이었다.

 

아, 저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각자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가고 있구나. 추운 겨울의 골목을 지나 도시의 끝에 있을 사랑하는 이들의 품으로. 본디 그런 것에 무감한 자신마저도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 것만 같아 케이크의 살점을 조금 뜯어 입안으로 조심히 밀어 넣었다. 당연하게도 달콤한 맛이 퍼지기 시작했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단 것들이 침을 타고 돌아 미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루는 가벼운 허밍을 내며 한입 더 잘라 입에 넣었다. 그 반응에 드디어 긴장이 풀린 듯 굳은 낯들이 부드러워지며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톨비쉬와 베인 또한 완전히 안심한 듯 따라 먹기 시작하며 일상의 얘기들을 꺼냈다. 다소 피비린내 나는 단어가 조금 오가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양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루는 이만 자연스럽게 포크를 내려 놓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티백을 거의 담그자마자 뺀 수준으로 약하게 우린 허브티였다. 향이나 겨우 날까 말까 한 그것을 들어 올린 그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신중히 듣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맛은 없었다. 원체 음식을 입에 대는 것도 영 싫어하기도 하고. 저 또한 요리를 하는 사람이니 저보다 미숙할 이들이 만족시킬 만한 것을 만들어 내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성의가 기꺼워 맛을 본 것인데, 아무래도 한 조각을 전부 비우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았다. 걱정스럽다는 듯 조금 더 입에 넣길 바라는 눈치지만 강요하지 않는 톨비쉬와 힐끗거리고는 있으나 부러 별 말을 하지 않고 있는 베인은 조용히 식사를 끝마쳤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세 사람 모두 단 것들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거대한 홀 케이크를 중앙에 둔 채 깨작거리고 있는 상황이 우스운 것 같기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달지 않은 레몬 허니 마들렌이라던가, 혹은 이런 식으로 차를 나눠 마시는 것 정도로 괜찮았을 텐데. 적어도 아주 작게 만들거나. 실제로도 두 사람의 손이 큰 탓인지, 혹은 워낙에 루의 식사량이 거의 없는 탓에 유독 거대하게 느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케이크는 양 손바닥을 펼쳐도 다 덮이지 않을 만큼 굉장히 큰 크기였다. 제 얼굴보다도 너비가 넓을 법한 저 골칫덩어리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일단은 두 사람의 마음이 큰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 루는 향이 나는 캔들에 간단히 불을 붙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톨비쉬, 베인. 아, 톨비쉬 먼저 불렀다고 그런 불퉁한 표정 짓지 말아요. 다음엔 베인 먼저 이름을 불러줄게요. 아직은 성탄절의 본 밤이 아니고 이브지만…. 그래도, 우리가 다 같이 평화롭게 모여 있고,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되기 위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될 테니 노래라도 함께 부르는 게 어때요? 옆 사람과 손에 손을 잡고 부르라는…, 그런 건 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농담인데도 벌써 찡그리기는요. 저 먼저 시작할게요.“

 

루는 아주 흔하디 흔해 빠진 캐럴 하나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탓에 이름조차 알 수는 없어도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모를 수가 없는 곡으로. 이어 톨비쉬가 따라 부드럽게 하모니를 넣었고, 베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도 흔쾌히 허밍을 어울리게 섞었다. 노래는 길어야 삼 분 남짓, 괜한 아쉬움에 후렴을 다시 한번 더 길고 느릿하게 불러도 채 오 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식당 구석에 세워둔 작은 탁상시계와 바깥의 거대한 종소리가 뒤섞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연이어 폭죽처럼 터지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성야제의 시작을 알렸다. 어느 새 일어난 톨비쉬가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손등을 잡곤 재차 입술을 눌러 묻었다. 이렇게 길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묻어나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그가 이윽고 겨우 제 입술을 떼어내면 루가 다정하게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톨비쉬."

 

"메리 크리스마스, 루."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인사할 수밖에 없겠군. 그대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

 

베인은 남은 루의 왼손을 잡은 채 톨비쉬를 따라 하듯 우아하게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다만 그가 했던 것과는 반대로, 베인이란 남자는 짧게 여러 번 반복해 부비며 애정 어린 몸짓을 보냈다. 그 뒤로도 묵혀 두었던 스파클링 샴페인을 꺼낸 루가 둘의 기분을 돋구어 주며 대화를 받아주고는 더 늦기 전에 얼른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곳에서 자고 가도 된다는 말을 한 톨비쉬와, 그렇다면 나는 바닥도 괜찮다는 베인의 말싸움을 보며 하루의 늦밤이자 이른 새벽을 마무리한 루가 이제서야 앞치마를 벗고 준비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곤 창문가에 서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고층이 빽빽한 빌딩, 어둠 속 빛나는 지상의 별들. 모두가 잠이 들어야 할 시간인데도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들뜬 함성이 끊기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지나도 아침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겨울의 밤은 유독 긴 법이다. 그럼에도 태양은 지지 않고 아침을 찾아 돌아오겠지. 루는 단 하나 켜두었던 어두운 조명을 마저 끈 채 거리로 나섰다. 새벽의 거리는 한산했다. 그리고 또, 익숙했다. 살수가 아닌 루 그 자체의 평범한 시민으로서는 처음 오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머리 위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살랑이면 차가운 날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루는 하염없이 이리저리 다른 이들의 마음을 찾아 쏘다니다 문득 어느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달리 아름다울 곳도 없고, 그다지 특별할 곳도 없는 육로 위였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보낼 셈이었다. 휴일인데도 정장을 전부 챙겨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 한껏 옷을 꾸며 입고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지는 사람들, 그리고 또….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들.

 

그는 노을이 지도록 내내 그곳에 서 있다가 저를 열렬히 바라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중년의 여성인 듯한 그 사람을 같이 마주하다 인사를 건넸다. 이름 모를 분, 메리 크리스마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번 크리스마스엔 구룡에도 눈이 올지도 모르겠어요. 얼마 남지 않았지만요.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어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그가 미련 없이 떠난 자리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오님(@Leadme_cr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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